기록

<한지와 영주>, 최은영

jiyoung.park 2023. 10. 4. 22:10

[쇼코의 미소] 한지와 영주 - 최은영
 
p.143
"넌 낭비를 하고 있는 거야. 그것도 가장 멍청한 낭비를. 이십대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산다면, 결국 우리 엄마 아빠처럼 평생 집도 없이 살게 될 거야. 평생 남의 밑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시키는 일만 해도 자식 결혼하는 데 단 한푼도 보태줄 수 없는 사람이 될 거라고. 네가 대학원 간다고 했을 땐 교수가 되려는 목표라도 있는 줄 알았어. 그것도 아니었다면 왜 네 시간과 돈을 그런 곳에다 투자한 거야? 교수와 동료들이 널 어떻게 보겠니? 너,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모아둔 돈이 없으면 학위라도 있어야 하잖아. 그런 식으로 어정쩡하게 세상 살아봐. 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거야. 네 속에서 나온 자식 한번 네 품에 품어보지 못하는 인생을 살게 될 거라고."
나는 언니의 말에 동의했다. 언니의 목소리에 실린 분노에 가까운 두려움은 나의 오래된 주인이었으니까. 그 두려움은 어린 시절 부터 꾸준히 나를 추동했고 겉보기에는 그다지 위태로워 보이지 않는 어른으로 키워냈다. 두려움은 내게 생긴 대로 살아서는 안 되며 보다 나은 인간으로 변모하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고 말해왔었다. 달라지지 않는다면, 더 나아지지 않는다면 나는 이 세계에서 소거되어버릴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곳에 머물기를 택했다.
 
 
p.178
어디에서나 존재감이 없는 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한지.
자신감이 없고 무슨 말이든 우물쭈물하는 나. 누구와 있어도 자연스럽게 말하는 한지.
제대로 웃지도 못해서 입을 가리는 나. 꾸밈없는 표정의 한지.
어쩌면 한지는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다른 아이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나를 그저 돌봐줘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라고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대등한 관계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연인이 될 수 없었고, 친구로 만나기에도 나는 부족한 사람이었다.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겠지만 나 자신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내가 자신을 '만나던 것'이라고 말했던 전 남자친구가 생각났다. 어쩌면 그와 나를 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 묶어줬던 건,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믿었던 우리의 공통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의 열등감이 나의 열등감보다 더 컸으므로 나는 그를 경멸하며 나에 대한 경멸을 피해왔을 뿐이었다.

"무슨 생각 해?" 한지가 물었다.
"한 달 반이 지나면 네가 나이로비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해"
한지는 침묵했다.
우리가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면 여기에서 지냈던 시간을 얼마나 기억하게 될까?" 내가 물었다.
"거의 모든 걸 잊어버리게 되겠지." 한지가 답했다.
"나는 그게 싫어."
"뭐가?"
"잊어버리는 것."
나는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서 펼쳐 보였다.
"내 일기야. 여기에 도착해서부터 매일 써왔던 거야, 읽어도 돼."


p.183
"기억은 재능이야. 넌 그런 재능을 타고났어." 
할머니는 어린 내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란다. 그러니 너 자신을 조금이라도 무디게 해라. 행복한 기억이라면 더더욱 조심하렴. 행복한 기억은 보물처럼 보이지만 타오르는 숯과 같아. 두 손에 쥐고 있으면 너만 다치니 털어버려라. 얘야, 그건 선물이 아니야."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불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사람이 현생에 대한 기억 때문에 윤회 한다고 했다. 마음이 기억에 붙어버리면 떼어낼 방법이 없어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법이라고 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애도는 충분히 하되 그 슬픔에 잡아먹혀버리지 말라고 했다. 안 그러면 자꾸만 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마지막 그 말이 무서웠다.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억은 현재를 부식시키고 마음을 지치게 해 우리를 늙고 병들게 한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 말을 언제나 기억한다.
 

p.195
침묵은 나의 헐벗은 마음을 정직하게 보게 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 누군가와 깊이 결합하여 분리되고 싶지 않은 마음, 잊고 싶은 마음, 잊고 싶지 않은 마음, 잊히고 싶은 마음. 잊히고 싶지 않은 마음, 온전히 이해받으면서도 해부되고 싶지 않은 마음,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 상처받아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 무엇보다도 한지를 보고 싶다는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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