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코의 미소] 먼 곳에서 온 노래 - 최은영
p.215
“넌 아무것도 아니야.” 율랴가 말했다. "소은은 그런 얘기 들어 본 적 있어요? 난 어릴 때부터 그런 이야기 자주 들었어요. 넌 아무것도 아니야.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녀는 벽에 걸린 말린 꽃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소은. 어린애들은요. 어른이 한 말을 다 진짜로 믿고 받아들여요. 평생 동안 그 말과 함께 살아가는 거지요.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버지가 내게 말했어요. 너는 쓸모없는 계집애야. 덩치만 큰 계집애. 눈에 띄고 싶지 않았는데도 자꾸만 몸이 커졌습니다. 웅크리면 조금이라도 작아 보일까 해서 구부정하게 다녔지만 소용없었어요. 사라지고만 싶었습니다. 러시아 남자가 청혼했을 때, 도망치듯 그와 결혼해서 여기로 온 건 그런 이유였지요. 그가 나를 무시하고 이유 없이 욕을 해도 그 사람을 떠날 수가 없었어요. 아무것도 아닌 나와 결혼까지 해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나봅니다." 율라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p.216
미진은 내게 고마워했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때 나는 나보다 약한 누군가를 도와주는 내 모습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말로는 친구라고 하면서도 내가 미진보다 더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는 나 없이 아무것도 못해, 라고. 미진이 점점 더 러시아 말을 잘하게 될수록, 저의 도움이 필요 없어질수록, 매력적인 친구들과 어울릴수록 미진에게 화가 났습니다. 미진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넌 아무것도 아니야 넌 아무것도 아니야. 그게 날 견딜 수 없게 하더군요. 이타심인 줄 알았던 마음이 결국은 이기심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건 미진이 떠난 이 후였습니다.
p.222
"미진아, 경석 형이 새내기 예뻐서 좋은 말씀 해주시는 거잖아, 형, 아시잖아요. 쟤 예민한 거. 미진아, 사과드려. 경석 형께, 다른 형들께도 사과드려." 기자 선배가 미진 선배의 팔을 붙잡았다.
"이거 놓으세요." 미진 선배가 기자 선배의 손을 뿌리쳤다. "학번이 벼슬입니까? 해마다 나타나서 제일 어리고 만만한 여자애 붙잡고서 주정하는 인간도 제 선배입니까? 신경석씨, 민주주의 사랑한다고 하셨어요? 이 작은 집단에서도 자기보다 약한 사람 위에 서야 후련한 사람이 무슨 민주주의 운운이에요. 당신 같은 사람은 차라리 독재가 편할 거야. 인간이 평등하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잖아요. 솔직히. 씨발, 이 더러운 꼴을 꼭 쟤한테까지 보여야 합니까? 전 이제 그러기 싫어요. 싫습니다."
"넌 항상 이렇게 감정적이었어. 그게 네 약점이고, 그거 극복 못하면 너 사회생활 못해." 기자 선배가 말했다.
"김연숙씨나 잘하세요. 여자인 게 그렇게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 었어요? 여자들은 감정적이고, 분란 일으키고, 이기적이어서 조직 배반하기 쉽고, 여자의 적은 여자고. 그런 자기부정이 김연숙씨가 말하는 건강함이었습니까? 여자 후배들 앞에서 부끄러운 줄 아세요." 그렇게 말하는 선배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p.224
지금 생각해보면 고집불통에 독한 인간이라는 소리를 듣던 선배도 고작 이십대 초반이었을 뿐이다. 여러 사람의 미움을 견디기로 마음먹었다고 하더라도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겠지. 자신을 지지하고 인정해주는 동료가 없는 내부에서의 투쟁이란 대체 얼마 만큼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까. 그날 로터리 횡단보도 앞에서 스물다섯 선배가 흘렸던 눈물은 분노가 아니라 그때까지 누적된 외로움이었는지도 모른다.
p.227
나는 내 병을 지독한 구취로 기억한다. 아무리 이를 닦고 샤워해도 그 냄새가 몸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침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 힘들었고, 화장실까지 걸어가는 일이 불가능하게 느껴졌던 때도 있었다. 스스로에게 잔인하리만치 근면했던 삶의 태도도 그 병 앞에서는 일말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샤워하고 머리 말리고 옷 입고 밖으로 나가는 것만으로도 하루치의 체력과 정신력이 소진되었다. 나는 내 몸의 주인이 아니었다.
병원 복도 창밖으로는 길 건너 마로니에 공원이 보였다. 마로니에 공원 담벼락 위에 앉아 여한 없이 노래를 부르던 스물, 스물하나의 나와, 약물 부작용으로 가만히 서 있다가도 무릎이 꺾여 주저 앉는 스물넷의 내가 같은 사람인가. 마로니에 공원에서 노래를 부르던 기억, 그 노랫소리, 웃음을 나는 잃었다. 실수로 꼬리 칸을 자르고 앞으로 달려가는 기차처럼, 예전에 내가 나라고 알던 사람을 나는 잃어버렸다. 스물의 나는 스물넷의 나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되어 내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두운 레일 위에 우두커니 남겨졌다.
p.231
안녕, 소은아. 선배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나에게 인사하는 선배에게 나는 웃어주지 못했다.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살지 말라는 선배의 말이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는 잔소리처럼 들렸다. 내가 겨우 병에서 벗어나고 있을 때, 무리를 해서 한국에 왔던 선배에게 나는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선배는 언제나 어른스러운 사람이고, 나는 미숙한데다 아프기까지 한 덜떨어진 인간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선배의 애정 없이는 그 시간을 건너올 수 없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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