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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by jiyoung.park 2023. 11. 13.
&lt;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gt;, 양귀자


p.49
주관도, 안목도 없이 오직 '가졌다' 라는 사실에만 집착하는 그들에 편승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그것들을 누릴 자격이나 안목이 있다면 삶을 보다 편안하게 사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적당한 돈을 지급하고 대신 안락함을 얻는 일에 너무 인색하지 말 것. 그렇게 얻어지는 평화가 창조에 기여할 수 있다면 물질을 아끼지 말 것.
 

p.55
"남자가 한번 말을 꺼냈는데 그냥 물러설 수 있습니까? 이번엔 제가 직접 부딪쳐 보기로 했습니다." 
역시 보통밖에 안 되는 사람이다. 내가 그래도 남자인데, 어쩌고 하는 정도의 말솜씨로 환심을 사보겠다는 사람이 아직도 있었나. 나는 경멸의 미소를 띠며 점잖게 한마디 했다.
"글쎄요. 말을 꺼냈기 때문에 물러설 수 없었다면, 그 말은 안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p.62
남기 같은 인간을 다루는 법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의 첫 번째는 일정한 거리를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다. 인간은 간사한 동물이어서 처음에는 감지덕지하며 거리 안으로 들어오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그 이상을 바라게 되는 법이다. 원숭이는 원숭이일 뿐이다. 원숭이에게 사람 대접을 해서는 사람에게도, 원숭이에게도 모두 좋지 않은 결과만 낳는다.
 

p.68
나는 자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이처럼 아주 많은 경우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여기며 산다. 북극의 유빙이 그렇듯 숨겨진 힘은 드러난 것보다 강하다.
 

p.69
나는 쇼핑을 하면서 점원들에게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하지 않는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건 표정 하나 바꾸지 않는다. 나는 알고 있다. 말이 많고 망설임이 많은 고객일수록 점원에게 얕보인다는 것을. 당연한 일이다. 많이 드러낼수록 바닥이 보이는 법이니까.
 

p.72
희생이라니. 고통의 인내는 미덕이 아니다. 그것이 미덕이라는 주장은 기득권을 전 자들의 염치없는 요구일 뿐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보수주의자들을 혐오한다. 그들은 정신의 진보를 억압한다. 억압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

강자에게 짓밟히는 약자들이 끝없이 소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힘. 언젠가는 힘으로 다시 너를 누르리라. 내게 힘이 있다면 반드시 지금 당한 그대로 너에게 돌려주리라.
 

p.86
그것뿐이 아니다. 언론이 즐겨 사용하는 말에 사회 지도층 인사라는 것이 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영 비위가 상한다. 
단언하건대, 사회를 어지럽히는 인사는 있을지인정 사회를 지도하는 인사는 없다. 대단찮은 학식이나, 상업주의 언론에 이름을 팔은 속된 명성으로 자신을 지도층 인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나는 가장 혐오한다.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
그 누구도 어떤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방식대로 살뿐이다. 선각자는 있어도 지도자는 없는 것이다.
자신을 내던져 새로운 것을 깨우치는 일은 존중받을 수 있으나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채 남을 지도하려 드는 일은 조롱받아 마땅하다.
 

p.98
고요한 밤, 깊은 밤.
나는 느닷없이 크리스마스 캐럴이 생각난다. 고요한 밤의 시간 깊은 밤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나는 거룩한 밤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고요하고 깊은 것은 모두 거룩한 것이다. 나는 언어의 표피를 만지는 것보다 그것의 본질을 만지는 것을 더 좋아한다. 쓸데없는 말의 낭비는 딱 질색인 것이다.
 

p.110
좋은 게 좋다니.
나는 평소 그런 소리를 가장 싫어한다. 도대체가 앞의 좋은 것은 무엇이고 그래서 얻어진 뒤의 좋은 상태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마치 바보들의 대화처럼 들린다. 논리나 분석은 전혀 없는. 이해조차 불분명한 말장난들.
 

p.113
훗날 『알프스의 소녀』를 읽었지만, 호기심을 부풀리며 야금야금 아껴서 읽었던 『괴도 루팡』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전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알프스의 소녀』는 여자애가, 그리고 『괴도 루팡』은 남자애가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 여선생을 경멸하기 시작 한 것은 중학교에 입학해서였다. 가사 시간에 바느질과 요리를 가르치면서 걸핏하면 여자니까 당연히 이런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강조하던 나이 많은 가사 선생과 그 여선생을 나는 똑같은 차원에서 경멸했다.
하지만 서랍 속에 읽지 않은 책을 넣어두고 모른 척 밖에 나와 아이들과 놀던 그때의 설레는 미소까지 경멸한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동화책의 추억이 내 회상 목록에 담겨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내 기억의 저장 창고를 아주 철저하게 관리하는 사람이니까. 사람이 평생을 살며 저장해야 할 기억은 무수히 많은 법이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그것을 선별하고 취사선택해서 회상의 목록을 만든다. 나의 무의식은 이런 일에 아주 까다롭다. 즐겁고 아릿한 것만 추억하고 살기에도 짧은 삶이 아니던가.
 

p.155
아무도 하지 않은 말, 아무나 할 수 없는 말, 나는 그런 미지의 언어를 원한다.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이 세상에 새로움 이란 없다'는 식의 단언이다.
나는 낡은 생각, 낡은 언어, 낡은 사랑을 혐오한다. 나의 출발점은 그 낡음을 뒤집은 자리에 있다. 장애물이 나와도 나는 그것을 뒤집어 버린다.
세상은 나의 운동장이다. 절대 그늘에 앉아 시간이나 갉아먹으며 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다.
 

p.262
그러면서 백승하는 문득 내 손을 꽉 움켜잡는다. 마치 험한 길을 함께 가는 동지의 손을 잡듯이. 그런 백승하를 나는 가만 내버려 둔다. 비록 적군이라 해도 가끔은 동지가 되기도 하는 것이 삶이란 이름의 연극이므로.
 

p.336
희극은 어둡고 음울하게. 그리고 비극은 밝고 산뜻하게.
기가 막힌다. 나는 여성 심리의 공부를 마친 다음에는 연극 조명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해본다. 언젠가 말한 적이 있지만 내 필생의 사업은 공부다. 나는 학위나 명예에 초월한 담백한 지적탐구에 흥미가 있는 사람이었다. 알고 보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알아야 할 것'들을 그냥 지나치고 있는가. 알아야 할 것에 비하면 알고 있는 것은 얼마나 작고 초라한가.
 

작가의 말
나는 가능하면 이 소설이 여성소설의 범주에서만 읽히지 않고 세상의 온갖 불합리와 유형무형의 폭력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함께 읽히기를 감히 소망한다. 그것이 삶을 대하는 진정한 예의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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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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