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52
그 글을 읽고 당신은 과거의 자신을 바라봤다. 남자 선배들이 그 사건을 영웅담으로. 농담으로 이야기할 때 그저 미친놈들의 헛소리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을. 그저 듣기 싫고, 피하고만 싶어서 못 들은 척했던 그때의 자신을. 정윤의 글을 읽은 당신은 그 글을 읽기 전의 당신이 아니었다.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p.55
정윤은 자기감정을 철저하게 숨기지 못했다. 희영에 대한 호감, 그녀가 쓴 글에 대한 애정. 희영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 희영과 함께할 때의 기쁨 같은 것들을 제대로 감추지 못해서 당신을 외롭게 했다. 정윤은 공평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기에 그런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당신 눈에 보였으므로, 당신은 언제나 그런 공기를 읽는 사람이었으므로, 당신은 느낄 수 있었다.
p.63
당신은 입을 다물고 희영의 감정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편집부에서 가장 가까웠던 정윤을 빼앗긴 심정일지, 회의 시간마다 희영의 주장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용욱에 대한 거부감일지. 어쩌면 희영은 그때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지금의 당신은 생각한다. 정윤을 존경한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정윤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정윤이 자신보다 더 돋보이는 것을 경계했던 용욱의 마음을 꿰뚫어보았는지도 모른다고.
당신은 지나가는 말로라도 희영에게 칭찬을 한 적이 없었다. 희영의 통찰력, 글쓰기 능력, 절제력을 갖고 자기 삶을 운영하는 능력에 대해서. 희영이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 어떤 의미에서 강한 사람인지 이야기해야 했던 사람은 당신이었는데도. 당신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순간 당신의 초라함이 더 분명해지리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돌이켜보면, 희영은 언제나 당신의 인정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함께 글쓰기를 시작한 친구의 인정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던 희영의 재능에 대해서 희영 자신은 한 번도 확신한 적이 없었다. 분명한 논리로 자기 의견을 관철시켜가던 희영의 강한 얼굴 뒤로 자신은 글을 쓸 자격도 재주도 없다는 괴로움이 자리하고 있는 줄 그때의 당신은 알지 못했다. 나는 말했어야 했어. 당신은 그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자기 확신으 로 가득찬 인터뷰이들을 만날 때마다 당신은 희영을 생각했다.
p.79
글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모르겠어. 정말 그런가•·••.
내가 여기서 언니들이랑 밥하고 청소하고 애들 보는 일보다 글쓰는 게 더 숭고한 일인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누가 물으면 난 잘 모르겠다고 답할 것 같아.
희영은 열어놓은 창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내가 그랬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달랐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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