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5
나는 재미있는 사람도, 웃기는 사람도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나는 비정규직 은행원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다이어트가 필요한 어린 여자애였으며, 누군가에게는 일을 처리해줄 기계였고, 누군가에게는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감정도, 생각도, 느낌도, 자기만의 언어도 없는 반격할 힘도 없는 인형이었으니까.
p.33
그녀는 복제 인간인 캐시가 죽음을 앞두고 계속해서 헤일에서의 일을 기억하려 하는 것이 아름다웠다고 답했다. 캐시는 헤일 셤을 기억하는 행동으로 자신의 친구 루스와 토미의 영혼을 증명하고 있는 것 같다고. 자기 자신의 영혼조차도. 헤일은 그러니까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캐시 자신일 수도, 루스일 수도, 토미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아직도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기억하는 일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을 증명하는 행동이라는 말을.
p.35
그러면서 그녀는 그간 내가 제출한 에세이들에 대해 좋은 평을 했다. 명료하게 자기 생각을 보여주는 글도 있지만, 한쪽으로 비켜서서 응시하는 글도 있으며, 어떤 방식이 더 좋은 것인지는 분명히 이야기할 수 없다고 했다. 사람들이 하는 말에 휘둘리느라 자기 목소리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그녀는 내게 넌지시 말했다.
하나의 글을 놓고 여러 명이 부족한 부분을 중심으로 지적하는 식의 수업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혼잣말처럼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는 그런 말을 하며 책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기다란 손가락을 바라봤다.
p.41
나는 그때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인지 종종 상상해보곤 했다. 나도 모르는 거 아니야. 난 희원씨가 세상 탓하면서 해소되지도 않을 억울함 느끼는 것 바라지 않아. 나도 모르는 거 아니야. 난 희원씨가 어린 여자라는 이유로 무례하게 대하는 사람들, 그냥 무시해버렸으면 좋겠어. 나도 모르는 거 아니야. 난 희원씨가 상처의 원인을 헤집으면서 스스로를 더 괴롭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다음 문장이 어떻게 완성되었을지는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어떤 문장이든, 그녀는 내가 자신보다는 나은 경험을 하기를, 자신이 겪었던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자존심이자 힘이었으리라는 생각도 한다. 자신의 조건을 탓하지 않고, 자신이 겪는 부당함을 인지하면서도 인정은 하지 않으려는 마음 같은 것 말이다. 그 마음이 그녀를 지켜주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동의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는 마음이라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p.43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녀의 이름으로 나온 글이나 번역서를 찾을 수 없었다. 구 년 전의 내 눈에는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강해 보였던 그녀가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글이나 공부와 무관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때로는 나를 얼어붙게 한다. 나는 나아 갈 수 있을까.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 머물렀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떠난, 떠나게 된 숱한 사람들처럼 나 또한 그렇게 사라질까. 이 질문에 나는 온전한 긍정도, 온전한 부정도 할 수 없다. 나는 불안하지 않았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가 공부하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던 순간에 대해 쓴 글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퇴근해 책상 앞에 앉아 책에 밑줄을 긋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순간에 투명 망토를 두른 것 같았다고 그녀는 썼다. 세상에서 사라지는 기분이었다고. 그녀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세상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보다도 언제나 더 가깝게 느껴졌다고 썼다. 그럴 때면 벌어진 상처로 빛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고, 그 빛 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더 가보고 싶었다. ' 그녀는 그렇게 썼다. 나는 그녀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그녀의 언어가 나의 마음을 설명해주는 경험을 했다.
나도, 더 가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어쩌던 그때의 나는 막연하게나마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닮은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내 앞에서 걸어주고, 내가, 밥을 다른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 그런 빛을 좇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빛을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에게서 보고 싶었다. 그 빛이 사라진 후, 나는 아직 더듬거리며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어림해보곤 한다. 그리고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도. 나는 그녀가 갔던 곳까지는 온 걸까. 아직 다다르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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