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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칵테일, 러브, 좀비>, 조예은

by jiyoung.park 2023. 10. 17.


칵테일, 러브, 좀비 - 조예은 단편선

* 밀리의 서재 - 모바일 기준 페이지로 실물 책과 페이지 넘버가 다를 수 있습니다

 

<습지의 사랑>

p.41

물의 공백을 메운 건 대부분이 생각들이었다. 시간이 많아지면 생각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지면 우울이 찾아들기 마련이다. 아주 나중에, 물고기들이 다 사라지고 하천이 말라붙은 후에도 계속될 삶을 상상하면 질긴 수초가 목을 조르는 듯한 갑갑함이 밀려오곤 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물은 생각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냥, 수표면에 동동 뜬 채 떨어지는 나뭇잎을 세고,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살았다.

 

p.53

하천에서 나갈 수 없는 몸뚱이도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숲은 늘 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걸까.”

  물은 갈수록 숲이 궁금해졌다. 궁금함은 갈증 같아서, 물속에 있는데도 목이 말랐다. 녹조 낀 물을 마구 마셨지만 소용없었다. 물은 이 갈증이 숲과 함께하는 순간에만 가신다는 걸 알았다.

  물은 폭우를 기다렸다. 물귀신이 땅을 밟을 수 있을 때는 비가 와서 하천이 범람할 때뿐이었다. 온갖 안 좋은 일들이 벌어지는 그런 날. 그런 날에는 어차피 다들 뭔가 선을 넘으므로 물도 물에서 나갈 수가 있었다. 숲에게 가기 위해서는 비가 필요했다. 하천이 범람할 정도로 많은 비가.

  그렇게 계절이 갔다. 그사이 물과 숲은 매일 만났다. 물은 다가갈 수 있는 가장 얕은 곳까지 갔고, 숲도 나아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가서 서로를 보았다. 그럼에도 둘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유령의 목소리는 한없이 미약한 탓에 바람이 부는 날이면 아무리 외쳐도 서로의 말소리가 닿지 않았다. 숲은 여전히 검은 소나무 숲을 맴돌았고, 가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p.57

숲이 물었다.

  “넌 이름이 뭐야?”

  물은 죽기 전의 자신에 관해서는 기억나는 게 없었다. 숲처럼, 자신도 뭔가를 말해 주고 싶었는데. 물은 슬퍼졌다. 받은 만큼 돌려줄 수 없는 마음이 슬펐다. 물은 더듬거리다가 답했다.

  “나는 잊어버렸어. 알려 줄 이름이 없어. 이름은커녕 얼굴을 본 지도 무척 오래돼서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

  그러자 숲이 답했다.

  “없으면 다시 만들면 돼. 네가 누구인지 이름을 정하는 거야.”

  처음 듣는 말이었다. 너무 가슴 떨리는 말이어서 자신이 이런 말을 들어도 되는지 두려웠다. 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숲에게 들은 말이 어딘가 부끄러웠고, 이럴 때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몰랐다.

 

p. 58

숲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여울은 어때?”

  “여울?”

  “네가 사는 저 하천, 여울목이라고 부르더라. 우리 장난에 당했던 낚시꾼이 그렇게 불렀어.”

  “여울.”

  마음에 들었다. 사실, 숲이 어떤 이름을 가져다 붙였어도 물은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숲의 이름처럼 이응이 두 번이나 들어가는 게 마음에 들었다. 한 쌍 같았다. 물은 수줍게 좋다고 답했다. 숲이 물의 축축한 손을 잡고 말했다.

  “다음에는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는 거야.” 

 

<칵테일, 러브, 좀비>

p.69

주연은 사각형 식탁 앞에 앉은 아빠를 가리켰다. 창백한 안색의 아빠는 느리게 눈을 끔뻑이며, 빈 그릇에 헛숟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눈에 초점이라고는 없었고, 그의 주위에서는 은은한 쉰내가 풍겨 왔다. 주연은 화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이 끓어오르는 것을 꾹꾹 눌러 참고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지금 이상하잖아.”

  “네 아빠가 뭐?”

  “좀비! 좀비가 되었다고. 엄마는 저게 산 사람으로 보여?”

 

p.71

보통 좀비가 나오면, 세상은 망한다. 지금껏 주연이 보아 온 좀비 영화에서는 그랬다. 망하지 않으려면 인간이 아닌 수준의 정의감과 체력, 두뇌를 가진 히어로들이 백신을 찾아야만 하는데, 현실에 그런 히어로는 없다. 그러니 세상은 곧 망할 것이다. 세상이 망하지 않는다면 어쨌든 좀비가 나타난 서울, 그러니까 한국은 망할 것이다. 뭐… 한국이 망하지 않으면, 이것만은 확실하다. 우리 집은 망한다. 아니, 이미 망했다! 중학교 때 일기장을 펼쳐 보면 망했다는 말만 한가득인데.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주연은 밑도 끝도 없이 흘러가는 생각의 흐름을 간신히 붙잡았다. 그리고 다시 차분히 상황을 정리했다.

 

p.80

주연은 멍하니 조금씩 움직이는 기생충들을 바라봤다. 머리카락처럼 얇은 기생충의 표면에 저리 다양한 세포들이 꿈틀대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저렇게 작은 애들도 진화라는 걸 하는데, 살아 보려고 변하는데. 우리는 왜 지금껏 그대로였을까. 

 

p.82

주연은 자신에게 가족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했다. 아빠를 사랑했나?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엄마를 함부로 대하고 고집불통이고 자기 이야기만 맞다고 주장하는 그가 꼴 보기 싫었던 적도 많았다. 사실 싫은 기억이 더 많았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를 사랑하지만, 아빠와 함께 사는 엄마를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가끔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빠로 인한 스트레스를 자신에게 풀 때면 아빠와 마찬가지로 싫었다.

  그러면서도 앞에서는 적당히 웃었고, 그들이 주는 돈으로 생활하고, 대학을 다녔다. 가끔은 사랑한다고도 말했다. 주연은 그들이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래서 때때로 자신조차 싫어졌다. 결국 그 모든 증오의 밑바닥에 깔린 건 애정이었다.

  모든 가족들이 이럴까? 증오 없이 사랑만 하는 가족 따위는 텔레비전에나 나오는 거 아닌가? 그런 건 다 가식이다. 적당한 가식이 세상을 유지시킨다는 걸 안다.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p. 127

나는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찬석과 주고받는 사랑과 스토커로부터의 해방감을 한 몸에 다 주체하지 못해 행복감이 넘쳐흘렀다. 과포화 상태였다. 나는 비극을 피했다는 부분에서 약간의 뿌듯함까지 느꼈다. 영화의 해피엔딩을 이끌어 낸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종종 “어머, 너 요즘 얼굴 좋아졌다. 그 의심병 다 나았나 보네. 연애하니.”라며 비꼬는 것인지 칭찬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을 건넸고 나는 최대한 밝게 웃으며 그렇다고 답했다.

  그런 나날들이었다. 나는 언제까지고 이 행복한 날들이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그러하듯이, 사람의 인생이란 것이 그러하듯이, 이미 시작된 비극이 그러하듯이 그런 날들은 계속되지 않는다. 그런 날들은 짧기에 달콤한 것이다. 비극은 부메랑처럼 돌아오기 마련이고, 내가 해맑게 웃던 그 시점에 다시 우리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후기

최근 가장 꽂혀서 많이 읽은 최은영 작가의 책처럼 문단 하나 하나가 의미심장하고 기록하고 싶은 책이라기보단

소재가 독특해서 몰입하게 되는 책이었다. 특히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는 전개가 독특해서 다 읽고 나서 몇 분간 "와..."를 외치며 감탄을 했다.

칵테일, 러브, 좀비도 좀비물에 가부장적인 가정의 이야기를 섞은 것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가장 비현실적인 내용을 가장 현실적인 내용과 함께 결합한 것이 특이하고도 새로웠다. 아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