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먹을 거야.
너를 먹고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을 거야. 우리를 사람 취급 안 하던 괴물 같은 놈들이 모조리 늙어죽고 병들어 죽고 버림받아 죽고 그 주검이 산산이 흩어져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나는 살아 있을 거야. 죽은 너와 끝까지 살아남아 내가 죽어야 너도 죽게 만들 거야. 너를 따라 죽는 게 아니라 나를 따라 죽게 만들 거야.
네가 사라지도록 두고 보진 않을 거야.
살아남을 거야.
살아서 너를 기억할 거야.
애고 어른이고 우린 도통 아는 게 없었다. 이런저런 생활의 지혜 같은 것은 기가 막히게 잘 알면서도, 자기 삶을 관통하는 아주 결정적인 사실은 모른 채로, 때로는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로도 우리는 그럭저럭 살았던 것이다. 그런 비밀은 모르는 게 나은 때도 많다. 알아봤자 생각은 복잡해지고 골치만 아프고, 어떤 경우에는 자기 삶을 아예 부정하고 싶어지기도 하니까.
울면서도 모르는 게 죄냐고 물었다. 이모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 대답이나 설명보다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고. 더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데 지금 이해할 수 없다고 묻고 또 물어봤자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모르는 건 죄가 아닌데 기다리지 못하는 건 죄가 되기도 한다고. 이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죽으면 알 수 있을까 싶었다.
살아서는 답을 내리지 못한 것들, 죽으면 자연스레 알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모르겠다. 살아서 몰랐던 건 죽어서도 모른다. 차이가 있다면, 죽은 뒤에는 모른다고 괴로워하지 않는다는 것뿐.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두게 된다. 그것 자체로 완성.
작년에 구는 더 시골로 들어가자고 했다. 경찰도 공무원도 CCTV도 없는 산골로 들어가자고. 우리는 번개 맞아 죽은 고목 같은 집에서 까만 청설모처럼 살아야 한다고. 지상으로는 최대한 내려오지 말고 고목 안 고목 위에서만 살면 아무도 우리가 사람인 줄 모를 거라고. 나는 사람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사람 대접 받으려고 안간힘 쓰던 날을 생각했다. 이제 구는 사람이기를 아예 포기하려 하는구나. 사람보다 고목이나 청설모가 되려고 하는구나. 그래 그게 낫겠다. 사람 대접 받겠다고 평생을 싸우느니 그냥 이쯤에서 청설모가 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기꺼이 그러자고 했다. 사람 말고 다른 것이 되자고 했다.
노마 이야기라면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들었다. 듣고 있자니 울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참아야 하는 것이 많았다. 나는 많은 감정을 참고 살았다. 누나는 내가 참고 있는 것들을 물음표의 꼬챙이로 거듭 낚았다.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고 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조차 참고 살았다. 그 질문이 불러오는 온갖 감정을 참고 살았다. 계획을 세우는 것조차 버거웠다.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울 때에도 딱딱한 돈 무덤에 걸려 넘어졌다. 미래에 대한 내 근육은 한없이 느슨하고 무기력했다. 나의 미래는 오래전에 개봉한 맥주였다. 향과 알코올과 탄산이 다 날아간 미적지근한 그 병에 뚜껑만 다시 닫아놓고서 남에게나 나에게나 새것이라고 우겨대는 것 같았다. 영영 이렇게 살게 될까봐 겁이 난다고, 담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절대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라고 담은 말해줬었다. 그런 말도 무언가를 참는 것이었다. 참으며 말하거나 참으며 듣거나. 참게 되거나 참게 하거나.
참기 싫다고. 참는 게, 싫어졌다고. 나한테 묻지 말라고. 내가 뭘 알겠느냐고. 난 정말 열심히 살고 있다고. 근데 여긴 열심히 사는 게 정답이 아닌 세상 아니냐고.
내가 돈을 벌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가끔 소주를 권했다. 그 술을 받아 마신 적은 없었다. 아버지가 주는 술을 마신다는 것이…… 수긍의 악수처럼 느껴졌다. 당신이 내게 넘기는 짐을 잘 받겠다는 악수. 당신을 이해한다는 악수. 부모님에게 대놓고 반항한 적은 없었다. 아쉬운 소리나 원망을 해본 적도 없었다. 일을 해야 하면 일을 했고, 돈이 필요하다면 돈을 벌어서 드렸다. 부모님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 두 분이 게으르게 살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과 부모님을 이해한다는 말이 같은 뜻은 아니었기에, 아버지와 악수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시며 아버지 힘드시죠, 라는 눈빛을 건네고 싶진 않았다. 원망하지도 않지만 이해하지도 않는 선. 그 선을 지키는 것이 내가 부모님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담아. 우리를 기억해줄 사람은 없어. 우리가 우리를 기억해야 해.
누나 말을 듣다보면 나는 등신 병신 천치 같았다. 돈도 이기심도 꿈도 없으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낙오자 같았다.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소리야. 누나는 말했다. 하지만 내 귀에는 잘 되라는 소리가 아니라 나가 죽으라는 소리로 들렸다. 내겐 가망이 없다는 말처럼 들렸다. 걱정이 담긴 충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 내겐 그런 여유가 없었다. 타인의 말을 구기거나 접지 않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여유.
이모는 당신의 아버지처럼 당신이 느닷없이 죽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알았지만, 죽기 전에 내게 꼭 말해줘야 할 것은 없었다. 이모가 아는 것은 나도 알았고, 내가 모르는 것은 이모도 몰랐으니까. 자신이 병들었음을 알고서 이모는 말의 시작과 끝마다 내게 사랑한다고 했다. 천만 번은 했을 것이다. 세상 누구도 나만큼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호흡이 잦아들기 전에는 입 모양만으로 내게 잘 지내라고 말했다. 나는 잘 가라고 말하지 못했다.
저 기왓장에 소원을 써야 한다면 어떤 문장을 쓰겠느냐고. 곰곰 생각하던 구가 대답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나는 구의 말을 마음으로 따라했다.
구는 조금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안 된다면 이번 생은 빨리 감기로 돌려주세요.
그럼 빨리 죽잖아.
그럼…… 그냥 무로 돌려주세요. 아무것도 아닌 상태, 그래서 모든 것인 상태로.
싫어. 그것도 죽는 거잖아.
죽는 거 아니야. 그냥 좀 담대해지는 거야.
행복하자고 같이 있자는 게 아니야.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같이 있자는 거지.
동물의 힘은 유전된다. 유전된 힘으로 강한 놈이 약한 놈을 잡아먹는다. 불과 도구 없이도, 다리와 턱뼈와 이빨만으로. 인간의 돈도 유전된다. 유전된 돈으로 돈 없는 자를 잡아먹는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있는 사람도 살지 못하고, 돈이 있으면 죽어 마땅한 사람도 기세 좋게 살아간다.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었을 때 그 안에서 온갖 나쁜 것들이 빠져나왔대. 근데 거기 희망은 왜 있었을까. 희망은 왜 나쁜 것을 모아두는 그 항아리 안에 있었을까. 이 얘기를 담에게 꼭 해주고 싶었는데 해주지도 못하고 나는 죽었다. 희망은 해롭다. 그것은 미래니까. 잡을 수 없으니까.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끌어들이니까. 욕심을 만드니까. 신기루 같은 거니까.
개인적인 취향으로 내 취향의 소설은 아니었다. 생각할 거리가 있는 이야기거나 따뜻한 교훈을 주는 이야기 혹은 내 비루한 상상력으로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풀어내는 소설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약간 괴기했고 전개가 그리 와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중간 중간 공감가는 문장이 많아서 좋았다.
https://link.coupang.com/a/bgRkk5
구의 증명
COUPANG
www.coupang.com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의 선물>, 은희경 (1) | 2023.12.21 |
---|---|
<천 개의 파랑>, 천선란 (0) | 2023.12.14 |
<부의 추월차선>, 엠제이 드마코 (0) | 2023.11.16 |
<좋은 일이 오려고 그러나보다>, 박여름 (0) | 2023.11.14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2) | 2023.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