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록

<새의 선물>, 은희경

by jiyoung.park 2023. 12. 21.

 

새의 선물, 은희경

 
p.10
나는 지금도 혐오감과 증오, 그리고 심지어는 사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극복의 대상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 대상을 똑바로 바라보곤 한다. 쥐를 똑바로 보면서 어금니에 고인 침 사이로 스테이크를 씹어 넘기듯이. 그것은 나의 오랜 습관이다.
 
p.11
나의 분방한 남성 편력은 물론 사랑에 대한 냉소에서 온다.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 언제라도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나의 열정은 삶에 대한 냉소에서 온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으며 당장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것들만 지니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해 왔다. 삶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그 삶에 성실하다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아이러니도 아니다.
 
p.12
내가 내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보여지는 나' 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본다. '보여지는 나'에게 내 삶을 이끌어가게 하면서 '바라보는 나'가 그것을 보도록 만든다. 이렇게 내 내면 속에 있는 또 다른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의 일거일동을 낱낱이 지켜보게 하는 것은 이십 년도 훨씬 더 된 습관이다.
그러므로 내 삶은 삶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거리를 유지하는 긴장으로써만 지탱돼왔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거리 밖에서 지켜보기를 원한다.
 
p.75
순분이, 즉 광진테라 아줌마는 이 모든 것을 견뎌냈다.
아줌마가 삶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바로 자기의 삶이라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양복점 뒷방에서 강제로 순결을 잃은 순간 이미 자기의 삶은 결정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아저씨가 자기의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달라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줌마는 그런 생각을 꿈에도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줌마들은 자기의 삶을 너무 빨리 결론짓는다. 자갈투성이 밭에 들어와서도 발길을 돌려 나갈 줄을 모른다. 바로 옆에 기름진 땅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한번 발을 들여놨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뼈 빠지게 그 밭만을 개간한다.
나는 아줌마가 자기의 삶을 한 발짝 벗어나서 바라보았으면 하고 생각해왔다. 그것은 성실하고 선량한 사람의 삶에 드리워지는 그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다.
 
p.76
하지만 내가 보기로 그런 아줌마의 표정에는 오래전에 끝난 전쟁의 뒷소식을 듣는 담담함이라기보다는 폭풍 전의 고요 같은 불길함이 있었다. 단단하게 다문 입속에서 아줌마의 혀는 어떤 반란의 격문을 부르짖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줌마처럼 자기의 고통을 드러내놓지 않는 사람은 그 고통을 가슴속에 쌓아놓고 있는 것이다. 해소되지 못하고 가슴속에 차곡차곡 압축 저장된 그 고통은 언젠가는 엄청난 폭발력으로 터져 나올 수도 있다.
그렇게 가슴속에 고통을 꾹꾹 눌러 저장하고 있다는 것이 아줌마가 품고 있는 진정한 비밀일지도 모른다.
 
p.86
나는 봉희처럼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하는 어린애들을 경원한다. 어른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것처럼 스스로 어린애임을 드러내 보이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어른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장 어린애답게 보이는 것이다. 어린애로 보이는 것은 편리하기도 하지만 비상시에는 강력한 무기도 된다.
 
p.136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쁘고 좋기만한 고운 정과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 정이 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정으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확실한 사랑의 이유가 있는 고운 정은 그 이유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지만 서로 부대끼는 사이에 조건 없이 생기는 미운 정은 그보다는 훨씬 질긴 감정이다. 미운 정이 더해져 고운 정과 함께 감정의 양면을 모두 갖춰야만 완전해지는 게 사랑이다.
할머니의 사랑 중에 고운 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나라면 이모는 물론 미운 정 쪽이다. 이모는 고운 정을 갖기는 틀렸기 때문에 할머니에게서 완전한 사랑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그러나 나는 미운 정을 얻기 위해 할머니에게 함부로 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자신이 없다. 어쩌면 미운 정이란 고운 정보다 훨씬 더 얻기 힘든 무르익은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p.150
고달픈 삶을 벗어난들 더 나은 삶이 있다는 확신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떠난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기보다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 확신도 없지만 더이상 지금 삶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된다는 점 때문에 떠나는 이의 발걸음은 가볍다. 그런 떠남을 생각하며 아줌마는 사라진 버스 쪽을 그렇게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는 것이리라.
 
p.188
드디어 뛰기 시작한 그의 뒷모습은 바지 뒤춤으로 흰 러닝셔츠가 비죽이 빠져나와 홀아비 영감처럼 칠칠맞지 못해 보인다. 변소 안에서 나온 때나 자고 일어나 방에서 나을 때처럼 옷차림이 흐트러지기 쉬운 때일수록 매무새가 단정해야 양반질하고 산다는 할머니의 가르침이 떠올랐지만 이상하게 그런 것도 허석의 이미지를 훼손시키지는 않는다. 삶의 이면을 많이 알다 보면 매사에 의심이 많아지기도 하겠지만 이렇게 이해심이 많아지는 면도 있는 것이다.
 
p.248
운명적이라고 생각해온 사랑이 흔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에 대한 냉소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빠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든지 다시 사랑에 빠지며,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 유지의 감각과 신랄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착 없이 그 사랑에 열중할 수가 있다.
사랑은 냉소에 의해 불붙여지며 그 냉소의 원인이 된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며 불성실하다. 나는 그것을 광진테라 아저씨 박광진씨를 통해서 알았다.
 
p.251
나쁜 사람이 나쁜 일을 저지르면 이야지거리일 뿐이지만 착한 사람이 나쁜 일을 저지르면 그것은 비극이 되기 때문이다.
 
p.343
삶이란 장난기와 악의로 차 있다. 기쁨을 준 다음에는 그것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 기쁨을 도로 뺏어갈지도 모르고 또 기쁨을 준 만큼의 슬픔을 주려고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너무 기쁨을 내색해도 안 된다. 그 기쁨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삶의 악의를 자극하는 것이 된다.
 
p.360
구국의 영웅이 되는 것과 살인자가 되는 것의 차이는 그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지는가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살인자가 되는 것은 그에게 살인을 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고 배신자가 되는 것 역시 배신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므로. 그 기회를 받아들이느냐 물리치느냐 하는 선택은 스스로가 하는 것이지만 선택의 전 단계에서 어떤 기회를 제공하느냐는 순전히 삶이 하는 일이다. 배신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만 배신을 하도록 기회를 마련하는 것은 언제나 삶의 짓인 것이다.
 
p.362
성숙한 어른이 슬퍼하는 것보다는 철없는 아이의 슬픔이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러므로 철없는 사람은 마음껏 철없이 행동하면서도 슬픔이 닥치면 불공평하게도 더 많은 사랑과 배려를 받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은 으레 슬픔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 같은 배려를 받지 못한다. 성숙한 사람은 언제나 손해이다. 나는 너무 일찍 성숙했고 그러기에 일찍부터 삶을 알게 된 만큼 삶에서 빨리 밑지기 시작했다.
 
p.403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최근에 읽었던 책들은 다 술술 읽히는 책이라 이 책을 읽을 때는 초반에 잘 안 읽혀서 좀 힘들었다. 그래도 읽다보니 재밌었다. 같은 시대 소설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으나 양귀자 소설 느낌도 나서 뇌피셜로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거나 비슷한 시대 배경이겠구나 싶었다. 
막 엄청 재밌는 소설은 아니고 일찍 철든 어린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을 담은 이야기였고, 인생책이라는 사람도 많던데 아직 왜 그런지는 깨닫지 못한 것을 보니 내가 미성숙할지도 모르겠다. ㅎ.ㅎ..



https://link.coupang.com/a/bklceS

새의 선물:은희경 장편소설

COUPANG

www.coupang.com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타이탄의 도구들>, 팀 페리스  (0) 2024.01.03
<뼈의 기록>, 천선란  (1) 2024.01.03
<천 개의 파랑>, 천선란  (0) 2023.12.14
<구의 증명>, 최진영  (2) 2023.11.22
<부의 추월차선>, 엠제이 드마코  (0) 2023.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