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3
"찬란하다."
콜리는 세상의 채도가 저렇게 높다는 것에 놀랐고 자신이 이 단어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러자 자신이 알고 있는 단어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졌다. 콜리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창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단어를 무작위로 뱉었다.
화려하다. 예쁘다. 아름답다. 노랗다. 붉다. 파랗다. 빠르다. 무섭다. 소름 끼치다. 서늘하다. 춥다. 덥다. 쨍하다. 아프다. 힘들다. 괴롭다. 몇몇 단어는 동사형이나 형용사형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콜리는 끝도 없이 읊었다. 단어가 화물칸에 가득 쌓여 포화되기 직전에 목적지에 도착했으며 콜리가 아는 단어도 거기서 멈췄다. 천 개. 콜리가 떠올린 단어는 천 개였다. 그 단어로 만들 수 있는 문장은 더 많을 것이다. 콜리는 자신이 몇 개까지 문장을 만들 수 있는지 궁금했지만 문이 열렸고, 콜리의 전원이 켜져 있음을 확인한 직원이 화들짝 놀라며 전원을 껐기 때문에 더는 문장을 만들 수 없었다.
p.21
하늘은 매일, 매시간마다 색과 모양이 바뀌었다. 하늘은 파란색이었지만 가끔 보라색이나 분홍색, 노란색, 회색이 섞이기도 했다. 그렇게 섞인 색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라 콜리는 '파랑분홍'이나 '회색노랑'으로 단어를 합쳐서 불렀다. 세상에는 단어가 천 개의 천 배 정도 더 필요해 보였다. 동시에 걱정이 들었다. 혹시 세상에 이미 그만큼의 단어가 있는데 자신이 모르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 단어들은 어디에서 알 수 있을까.
다양한 하늘이 존재했지만 콜리는 그중에서도 구름이 선명한 날을 좋아했다. 여기서 '좋아했다'는 더 자주, 더 오래도록 하늘을 바라봤다는 뜻이다. 구름은 제각기 다른 형태로 뭉쳐 있었으며 저마다 두께감이 달랐다. 하늘이 평면이 아니라 공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존재였다. 구름은 바람을 타고 흘러가기도 했다. 땅에 떨어지지 않고 하늘에 흐를 수 있는 물체라니. 무게가 있는 콜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루는 민주에게 구름을 만져 보고 싶다고 말했다. 민주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p.27
투데이가 빠른 속도로 달릴 때 콜리는 한 번 더 고삐를 놓고 투데이의 등에 손바닥을 얹었다. 당근을 먹었던 순간보다 더 빠르고 강렬한 진동 을 만났다. 콜리가 말 등에 앉아 경주를 진행하도록 만들어진 것처럼 이 생물도 달리기 위해 누군가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분명 했다. 투데이가 행복해한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콜리는 투데이가 행복하다면 자신도 행복한 거라고 정의 내렸다. 갈기가 물처럼 흐르고, 기쁨의 떨림이 몸을 감쌌다. 투데이의 빠른 박동을 콜리는 오롯이 전달받고 있었다. 투데이, 행복한가요? 그럼 저도 행복한 거예요.
p.58
경주 실력이 우수한 말끼리만 교배해 점점 더 빠른 말을 탄생시킨다. 연재는 이 말이 아직까지 이해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런 방식으로 몇 세대 후 태어난 말은 얼마만큼 빨라지는 것일 까. 그렇게 빨라진 말들이 끝내 달려야 하는 곳이 경마장이라면 그것은 너무나도 큰 발전과 재능의 낭비처럼 느껴졌다.
p.83
소방관이 놓지 않았던 보경의 3%에는 실로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보경은 언젠가, 한강 노을을 바라보며 바퀴를 열심히 굴리는 아이들이 멈추지 않고 달렸으면 좋겠다고 소방관에게 말했다. 삶이 이따금씩 의사도 묻지 않고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벽에 부딪혀 심한 상처가 난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방향을 잡으면 그만인 일이라고. 우리에게 희망이 1%라도 있는 한 그것은 충분히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에너지가 될 것이라고.
p.93
사람은 이따금씩 강렬하게 무언가에 끌렸다. 그게 사람일 수도, 사랑일 수도, 음악일 수도, 물건일 수도 있었다. 그 강렬한 끌림 앞에서는 무엇도 걸림돌이 될 수 없다. 마지막 월급을 전부 꼬라박을 정도의 강렬한 끌림을, 어제 연재는 다 망가진 콜리를 보고 느꼈으리라.
p.168
그리움이 밀고 들어오는 순간을 예견할 수 있다면 오래도록 그 순간을 만끽할 수 있게 준비라도 할 텐데, 친절하지 못했던 이별처럼 그리움도 불친절하게 찾아왔다.
p.180
주원은 남들과 다른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설명했고 이해했다. 가끔은 주원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때도 있었지만, 은혜는 주인의 표현방식이 좋았다. 주인의 배려는 남들과 다르다. 주원은 대화를 나누다가도 인도로 올라가는 길목에서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춰 은혜를 기다렸다. 그 행동에는 은혜를 배려해야겠다는 선의가 보이지 않았고 그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뿐이었다. 은혜는 그런 주원이 편했다. 주원에게는 선의가 아니었겠지만 은혜에게는 그것이 선의였다. 은혜가 미안함이나 고마움 따위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 사람 사이에 당연하게 일어나는 화음 같은 것.
p.186
그러니 이제 차분해질 차례였다. 운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없다. 눈물이 날 정도로 속이 엉망이지만 울면 더 엉망이 될 것이다. 시원하게 울었지만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평생도록 울게 아니라면 이쯤에서 우는 건 그만두어야 했다. 이제부터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은혜에게는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늘었다.
자, 너 이제 어떻게 할래?
답은 바로 내리지 못했다. 은혜는 일기장을 하나 만들었다. 그리고 첫 장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아프다.
다시금 스스로에게 물었다.
자, 그래서? 아픈게 뭐? 너 이제 진짜로 어떻게 할래?
음... 모르겠다.
네가 모르면 어떻게 해?
그럼 이걸 누가 알아? 답이 있기는 해? 해결할 수 있기는 해? 그럼 어디 한번 말해봐. 방법이 있으면 해볼 테니까.
...
봐봐, 없지? 모르겠으니까 일단은 열심히 할 거야.
뭐를?
뭐든! 밥 먹는 거든, 약 먹는 거든, 운동하는 거든, 공부하는 거든. 내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건 일단 열심히 하고 있을래. 그렇게 있다보면 무슨 일이든 방법이 생기지 않겠어?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수는 없잖아.
그래, 알겠어.
뭐가?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게.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나도 그걸 해볼게. 그리고 나를 내가 응원해볼게.
p.189
여기서 도망친다고 다른 뾰족한 수가 있어?
도망치면 왜 안 되는데?
뭐?
나도 피곤해서 좀 쉬게. 그게 나빠? 나라고 꼭 매사에 열정적으로 도전해야 돼? 왜? 남들은 안 그러잖아. 네가 말하는 보통 사람들은 피곤하면 쉬고, 힘들면 도망치고 하는 거잖아. 나도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짜증나 죽겠으니까.
p.204
"미안, 인간이 원래 이렇게 주책없어. 그런데 너는 그리움이 뭔지 모르겠지? 부럽다."
"그리움이 어떤 건지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요?" 보경은 콜리의 질문을 받자마자 깊은 생각에 빠졌다. 콜리는 이가 나간 컵에서 식어가는 커피를 쳐다보며 보경의 말을 기다 렸다.
"기억을 하나씩 포기하는 거야." 보경은 콜리가 아닌 주방에 난 창을 쳐다보며 말했다.
"문득문득 생각나지만 그때마다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 그래서 마음에 가지고 있는 덩어리를 하나씩 떼어내는 거지. 다 사라질 때까지."
"마음을 떼어낸다는 게 가능한가요? 그러다 죽어요."
"용. 이러다 나도 죽겠지, 죽으면 다 그만이지, 하면서 사는 거지"
p.205
"그리운 시절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에서 행복함을 느끼는 거야."
보경의 눈동자가 노을빛처럼 반짝거렸다. 반짝거리는 건 아름 답다는 건데, 콜리 눈에 그 반짝거림은 슬픔에 가까워 보였다.
"행복이 만병통치약이거든."
"행복한 순간만이 유일하게 그리움을 이겨."
그리움이란 그런 것이구나. 콜리에게도 그리워할 순간이 생겼다. 투데이와 주로를 달릴 때다. 투데이가 행복해하는 진동을 느끼면서.
p.213
바꿀 수 있는 아주 최소한의 방법이라도 떠오른다면 은혜는 그렇게 했을 거였다. 하지만 살아가며 맞닥뜨리게 되는 난관은 은혜가 뛰어넘거나 비껴갈 수 없을 만큼 커다랗고 무거웠다. 아예 방향을 틀어 다른 길로 가야만 했다. 그렇게 많은 길들이 막혔다. 은혜는 현재까지 무수히 많은 난관에 부딪혀 돌고 돌아 이 곳까지 오지 않았는가. 이 길의 끝을 알 수도 없고, 알게 된다고 한들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길로. 은혜는 이럴 때마다 자신의 한계에 대해 생각했다. 보경은 주어진 한계 따위는 없다고 살아오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지만 정말로 한계가 없다면 한계라는 것조차 모르지 않았을까.
p.216
"너도 나도 알아서 잘 살아갈 수 있는데. 반드시 도움이 필요 한 것도 아닌데,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처럼, 도움받지 못 하면 살아가지 못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기들 멋대로 생각하는 게 꼴 보기가 싫다. 우리 엄마는 내가 좋은 대학에 가서 남들에게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당당하게 보여주라고 하는데 나는 왜 굳이 그렇게 멋있게 살아서 내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있지, 나는 그냥 여행을 다니며 살고 싶어. 카메라 들고 밟지 않은 땅이 없을 만큼 아주 많이."
p.261
"고작 이틀에서 14일로 삶을 연장한다고 뭔가 달라질까?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생길까..?"
서진이 애처롭게 물어봤다. 자신의 취재 자료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하지만 연재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당연하지. 살아간다는 건 늘 그런 기회를 맞닥뜨린다는 거잖아. 살아 있어야 무언가를 바꿀 수 있기라도 하지."
p.274
보경은 꿈을 접어둠과 동시에 소방관을 잃었고, 그 꿈을 영영 펼칠 수 없게 되었다. 독립적인 사건들처럼 보였는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 모든 일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이 수면 위의 파동 같았다. 넓고 잔잔한 파동이 끊임없이 교차되고 연속되는, 그 에너지가 끝내 물살을 만들어버리는. 이왕이면 앞으로는 좋은 일의 파동만 생기기를 보경은 자주 기도했다.
p.278
소방관이 떠났다는 사실보다 앞으로 두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현실의 무게감이 더 무겁게 보경을 눌렀다. 슬픔도 배출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있었는데 놓쳤다. 현실의 무게감이 몸을 눌러 아무것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것은 몸속에서 흐르지도, 버릴 수도 없는 물로 오래도록 고여 있었다. 비린 냄새가 났다.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 몸을 뒤척일 때도 속에 쌓인 슬픔이 찰랑거리며 비린내를 풍겼다. 슬픔이 비림으로 바뀌자 후에는 꺼내려고 해도 비릿해서 꺼낼 수 없어졌다. 그렇게 계속 몸에 담아두었다. 고여서 비려질 때까지. 끝끝내 썩어 마를 날을 기다리면서.
p.285
슬픔을 겪은 많은 사람들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 것일까. 사실은 모두 멈춰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지구에 고여버린 시간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 시간들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렇다면 아주 천전히 움직여야겠네요."
콜리가 보경을 향해 조금 더 몸을 틀었다.
"멈춘 상태에서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많은 힘이 필요하니까요. 당신이 말했던 그리움을 이기는 방법과 같지 않을까요?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p.326
연재는 이해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숱한 시간 동안 이해받지 못해 상처 입은 날들이 쌓여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 터였다. 이해받기를 원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가 저마다의 고통과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척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란 모두에게 존재했다. 적어도 연재는 그렇게 생각했고, 이해받기를 포기했다.
p.327
이해받기를 포기한다는 건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연재는 상대방의 모든 행동에 사사건건 이유를 붙이지 않았다. 저렇게 행동하면 저렇구나, 하고 말았다.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 해서 그러는지 싫어해서 그러는지 따위를 생각하면 너무 많은 이해심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이해를 포기하면 모든 게 편해졌다. 관계에 기대를 걸지 않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았다. 적어도 지수를 만나기 전까지, 연재의 세계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였다. 적막이기도 했고.
지수는 연재에게 강풍으로 불어왔다. 잠잠했던 연재의 돛을 한 방에 날렸다.
p.329
아쉽다. 아쉬움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은 지 오래돼서 완전히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쉬움에는 약간의 설움이 섞여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아쉽다는 단어를 꺼내면서, 아쉬움에 면역되지 않은 마음이 설움에 정복당하는 듯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었다가는 지수에게 평생 놀림을 받을 것 같았으므로 연재는 꾸역꾸역 참았다.
콜리에게 알려줘야겠다. 인간에게는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속내를 알 수 있는 기능이 아예 없다. 다들 있다고 착각하는 것 뿐이다.
p.?
인간의 눈이란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어도 각자가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콜리는 인간의 구조가 참으로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함께 있지만 시간이 같이 흐르지 않으며 같은 곳을 보지만 서로 다른 것을 기억하고, 말하지 않으면 속마음을 알 수 없다. 때때로 생각과 말을 다르게 할 수도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다가 모든 연료를 다 소진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렸고, 다른 것을 보고 있어도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으며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것처럼 시간이 맞았다. 어렵고 복잡했다.
하지만 즐거울 것 같기도 했다. 콜리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면 모든 상황이 즐거웠으리라. 삶 자체가 연속되는 퀴즈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후기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좋았다. SF도 좋아하고 따뜻한 이야기도 좋아하고 무엇보다 완벽한 결말까지 어우러지는 소설이었다. 일자리도 로봇에게 점점 빼앗기는 세상에서도 경마가 사라지지 않고 점점 더 빨리 달리게 하기 위해 기수를 가벼운 로봇으로 만들어버리는 이야기가 꽤나 현실적이고 비판적이라 좋았다.
이미지 출처 - 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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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2019년 한국과학문학상 장편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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