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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 온 노래>, 최은영 [쇼코의 미소] 먼 곳에서 온 노래 - 최은영 p.215 “넌 아무것도 아니야.” 율랴가 말했다. "소은은 그런 얘기 들어 본 적 있어요? 난 어릴 때부터 그런 이야기 자주 들었어요. 넌 아무것도 아니야.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녀는 벽에 걸린 말린 꽃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소은. 어린애들은요. 어른이 한 말을 다 진짜로 믿고 받아들여요. 평생 동안 그 말과 함께 살아가는 거지요.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버지가 내게 말했어요. 너는 쓸모없는 계집애야. 덩치만 큰 계집애. 눈에 띄고 싶지 않았는데도 자꾸만 몸이 커졌습니다. 웅크리면 조금이라도 작아 보일까 해서 구부정하게 다녔지만 소용없었어요. 사라지고만 싶었습니다. 러시아 남자가 청혼했을 때,.. 2023. 9. 28.
<쇼코의 미소>, 최은영 쇼코의 미소 - 최은영 p.27 사실 쇼코는 아무 사람도 아니었다. 당장 쇼코를 잃어버린다고 해도 내 일상이 달라질 수는 없었다. 쇼코는 내 고용인도 아니었고, 나와 일상을 공유하는 대학 동기도 아니었고, 가까운 동네 친구도 아니었다. 일상이라는 기계를 돌리는 단순한 톱니바퀴들 속에 쇼코는 끼지 못했다. 진심으로, 쇼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쇼코에게 내가 어떤 의미이기를 바랐다. 쇼코가 내게 편지를 하지 않을 무렵부터 느꼈던 이상한 공허감. 쇼코에게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정신적인 허영심. p.29 쇼코는 퓨즈가 나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무거운 마음을 누르며 그림을 참 잘 그린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쇼코는 그림을 그릴까봐, 아니, 글을 써볼까, 라고 말하면서 예의 그 예의바른.. 2023. 9. 25.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 노희경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은 늙을 수 있다.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생각이 편견인 것을 직시하고, 늘 남의 말에 귀 기울일 것. 자기 생각이 옳다고 하는 순간, 늙고 있음을 알아챌 것. [10년 후 다시, 그 뒤의 이야기] 앞의 글을 읽는데 식은땀이 난다. 내가 십 년 전 이렇게 위험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 싶어, 입 안마저 바싹 탄다. 이 글이 인터넷에 떠돌며 내가 가르친 학생(후배라고 해야 맞다)들이 읽고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싶은 게, 책을 내는 이 마당에 이 글을 확 지우고 단 한 번도 이런 말을 한 적 없다고 시침을 떼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그래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든다. 사람은 누구나 어리석게 생각할 때가 있고, 세월이 흘러서.. 2023. 8. 29.
<말과 소리>, 옥타비아 버틀러 말과 소리 (Speech Sounds) - 옥타비아 버틀러 단편선, 블러드 차일드 그녀는 뒤늦게 그가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 쓸 수도 있겠지. 그녀는 돌연 남자가 미워졌다. 깊고 쓰라린 미움이었다. 남자에게 읽고 쓰는 능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 커서 경찰 놀이나 하는 남자에게! 하지만 그는 읽고 쓸 수 있었고 그녀는 아니었다. 영영 읽지도 쓰지도 못할 것이다. 그녀는 미움과 좌절과 질투에 속이 쓰렸다. 그녀의 손에서 몇 센티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장전된 총이 있었다. 라이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피가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분노는 최고조에 달했다가 사그라들었고, 라이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옵시디안은 머뭇거리면서도 친근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라.. 2023. 8.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