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25 <뼈의 기록>, 천선란 뼈의 기록, 천선란 (밀리의 서재 오리지널) 죽은 것들은 모두 형태를 잃고 흩어졌다가 무언가로 재조립되어 다시 탄생했다. 순환의 의미였지만 인간에게 순환은 형태의 재조립이 아니었다.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살아서는 갈 수 없는, 지금의 육신으로는 들어가지 못하는 다른 곳을 들렀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렇기에 인간은(적어도 로비스가 머물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죽음의 조의를 돌아간다고 표현했다. 어딘가로. 이곳에 오기 전에 먼저 머물렀던 그곳으로.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곳에 갈 수 없으므로 살아 있는 인간 중에서는 누구도 그곳을 확신할 수 없었음에도 인간들은 믿는다. 당연히 있으리라. 당연히 그곳에서 다시 만나리라. 그것이 죽음일까. 공간을 옮기는 것, 소멸이 아닌 돌아가는 것. 마음이라는 건 인간의.. 2024. 1. 3. <새의 선물>, 은희경 p.10 나는 지금도 혐오감과 증오, 그리고 심지어는 사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극복의 대상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 대상을 똑바로 바라보곤 한다. 쥐를 똑바로 보면서 어금니에 고인 침 사이로 스테이크를 씹어 넘기듯이. 그것은 나의 오랜 습관이다. p.11 나의 분방한 남성 편력은 물론 사랑에 대한 냉소에서 온다.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 언제라도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나의 열정은 삶에 대한 냉소에서 온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으며 당장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것들만 지니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해 왔다. 삶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그 삶에 성실하다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아이러니도 아니다. p.12 내.. 2023. 12. 21. <천 개의 파랑>, 천선란 p.13 "찬란하다." 콜리는 세상의 채도가 저렇게 높다는 것에 놀랐고 자신이 이 단어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러자 자신이 알고 있는 단어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졌다. 콜리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창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단어를 무작위로 뱉었다. 화려하다. 예쁘다. 아름답다. 노랗다. 붉다. 파랗다. 빠르다. 무섭다. 소름 끼치다. 서늘하다. 춥다. 덥다. 쨍하다. 아프다. 힘들다. 괴롭다. 몇몇 단어는 동사형이나 형용사형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콜리는 끝도 없이 읊었다. 단어가 화물칸에 가득 쌓여 포화되기 직전에 목적지에 도착했으며 콜리가 아는 단어도 거기서 멈췄다. 천 개. 콜리가 떠올린 단어는 천 개였다. 그 단어로 만들 수 있는 문장은 더 많을 것이다. 콜리는 자신이 .. 2023. 12. 14. <구의 증명>, 최진영 나는 너를 먹을 거야. 너를 먹고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을 거야. 우리를 사람 취급 안 하던 괴물 같은 놈들이 모조리 늙어죽고 병들어 죽고 버림받아 죽고 그 주검이 산산이 흩어져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나는 살아 있을 거야. 죽은 너와 끝까지 살아남아 내가 죽어야 너도 죽게 만들 거야. 너를 따라 죽는 게 아니라 나를 따라 죽게 만들 거야. 네가 사라지도록 두고 보진 않을 거야. 살아남을 거야. 살아서 너를 기억할 거야. 애고 어른이고 우린 도통 아는 게 없었다. 이런저런 생활의 지혜 같은 것은 기가 막히게 잘 알면서도, 자기 삶을 관통하는 아주 결정적인 사실은 모른 채로, 때로는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로도 우리는 그럭저럭 살았던 것이다. 그런 비밀은 모르는 게 나은 때도 많다. 알아봤자.. 2023. 11. 22. <부의 추월차선>, 엠제이 드마코 비록 가난했고 경비시설도 없었지만 나는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내 인생을 통제하는 사람은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부를 얻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이다. 여러 가지 요소들을 조심스럽게 한데 모아야 비로소 수백만 달러의 가치를 내는 공식이 완성된다. 믿음은 선택에 우선하며, 선택은 행동에 우선한다. 돈을 관리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 있어서 소득은 중요하지 않다. 돈 관리법을 모르면 인도 위의 삶을 벗어날 수 없다. 그 삶을 지속하느냐 벗어나느냐는 당신의 소득이 얼마고 차가 무엇인지와는 별개의 문제다. 부는 물질적인 소유물이나 돈, 또는 ‘물건’이 아니라 3F로 이루어진다. 3F는 부의 3요소로 가족(Family, 관계), 신체(Fitness, 건강), 그리고 자유(Freedom, 선택)을 말한.. 2023. 11. 16. <좋은 일이 오려고 그러나보다>, 박여름 이미 한 번 문제가 생긴 관계는 구멍 난 풍선에 바람을 부는 꼴이라 언젠간 지쳐 다시 끝이 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미웠다. 나는 그 풍선을 세상에서 가장 크고 예쁘게 불고 싶었는데. 정말 좋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닐까? 내 앞에서만큼은 모든 기준이 예외가 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사랑하는 동안에는 불안할 일도 없을 것 같고 내가 무언가가 싫다고 말하면 무작정 헤어지자는 말도 안 할 것 같고 날 두고 달아나지도 않을 것 같다. 예측 가능한 사람이 좋다. 싫어하는 일은 애초에 피해 가는 사람. 그러다 어쩔 수 없이 서운한 일 생기면 날 안아주는 사람. 화가 난다고 손 놓지 않는 사람. 내가 먼저 손 내밀면 자존심 세우지 않고 언제든 그 따뜻한 품에 날 넣어주는 사람. ‘사랑해!’라고 말하면 ‘넌 모르지?.. 2023. 11. 14.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p.49 주관도, 안목도 없이 오직 '가졌다' 라는 사실에만 집착하는 그들에 편승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그것들을 누릴 자격이나 안목이 있다면 삶을 보다 편안하게 사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적당한 돈을 지급하고 대신 안락함을 얻는 일에 너무 인색하지 말 것. 그렇게 얻어지는 평화가 창조에 기여할 수 있다면 물질을 아끼지 말 것. p.55 "남자가 한번 말을 꺼냈는데 그냥 물러설 수 있습니까? 이번엔 제가 직접 부딪쳐 보기로 했습니다." 역시 보통밖에 안 되는 사람이다. 내가 그래도 남자인데, 어쩌고 하는 정도의 말솜씨로 환심을 사보겠다는 사람이 아직도 있었나. 나는 경멸의 미소를 띠며 점잖게 한마디 했다. "글쎄요. 말을 꺼냈기 때문에 물러설 수 없었다면, 그 말은 안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2023. 11. 13. 이전 1 2 3 4 다음